청년을 둘러싼 유구한 날조의 역사1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젊은이론(-論)의 역사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저자는 상당히 풍부한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다이쇼 시대 이래로 버블경제 시기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라는 개념이 어떤 양상으로 논의되어 왔는지 탐색한다. 여기서 저자는 젊은이론의 갈래를 몇 가지로 분류한다.
먼저, “젊은이를 ‘이질적인 타자’로 여기는 ‘젊은이 비판’”이 있다. 청년을 기성세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타자로 상정하며, 그들의 어리석고 무모한 청춘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정말이지 익숙한 풍경이다. 비록 한국에서는 ‘꼰대질’이라는 단어의 유행과 함께 이러한 유형의 젊은이론은 많이 줄어든 듯도 하지만, 여전히 사석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달리 “요즘 젊은이들은 도전 정신이 없어서 공무원 시험이나 친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중장년이 넘쳐난다.
한편, 청년을 ‘편리한 협력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특히 저자는 이러한 시각이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젊은이들을 ‘이해가 빠른 어른’으로 취급하며 전쟁으로 내몰았다고 지적한다.
… 또 스즈키 구라조는 에도 시대가 남긴 “자아공리(自我功利)라는 부산물”과 “메이지 시대 이래, 구미에서 수입된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의 사상”이 결합해 현대(1941년) 대일본 제국에 “사상적인 전염병”을 만연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중 아직 젊어 “비교적 병이 가벼운” 젊은이들은 “국가의 기대주”이며, 더불어 “대동아 건설”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강변했다. … 한편 그가 언급한 젊은이는 ‘실재하지 않는 청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가 예찬한 존재는, 여전히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젊은이인 것이다.
마치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가 청년을 “산업화의 역군”으로 호명하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프로파간다는 비단 일본의 전시나 한국의 유사-전시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전쟁 중의 ‘젊은이 희망론’은 1990년대에 사업자들을 위해 내세운 정책과 매우 비슷하다. … 사업가는 일본 경제의 구세주이며 고용 창출도 담당하고 ‘공공’과 윤리를 중시하면서, 실패한 경우에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다.
이와 유사하게, 2010년대의 한국의 기성 언론들은 청년 세대가 공정의 가치를 중요시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언론들은 청년 세대가 공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고위공직자 자녀의 입시 비리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이러한 분석은 정말 사실일까?
언론에서는 모 고위공직자 자녀가 특혜를 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대학의 지역균형선발은 정시 지원자에 대한 역차별이며, 카풀 모빌리티 산업은 편법이 아니라 자유 경쟁이라고 주장하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을 비춘다. 그러나 나는 안타깝게도 같은 언론에서 자본에 의해 교육의 기회가 불공정하게 분배되는 문제나 공기업과 은행이 성별에 따라 합격자를 조작한 사건에는 분노하는 청년 세대는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선해해 보아도, 기성 언론이 보도하는 ‘청년’들은 기껏해야 선택적으로나 공정을 중요시한다. 그러한 ‘선택적 공정’은 언제나 현존하는 차별을 유지하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언론들은 젊은이들이 공정을 중요시하는 ‘이해가 빠른 어른들’이기 때문에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어쩌면 반대로 기성세대가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편리한 협력자’로서 공정을 중요시하는 청년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격차사회의 젊은이론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는 일억총중류 사회가 젊은이론의 성립을 이끌었다는 분석을 제시한다.
모든 계급이 ‘총체적으로 중산층’이 되었다고 하는, 즉 ‘계급’ 소멸의 환상이 ‘1억 명 모두가 중산층’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1억 명 모두가 중산층인 사회’의 진행과 나란히, ‘젊은이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제는 ‘젊은이(연령)’라는 것 이외의 차이는 그리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대로 말해, 계층이 개인의 삶에 있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는 (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지는 사회에서는) 세대론의 설명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같은 세대 안에서도 다르게 형성되는 다양하고 개별적인 경험들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선회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격차사회’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오늘날에 이르러, 종래의 ‘젊은이론’은 존속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적어도) 거품경제 붕괴 이전과 같은 도식으로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또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
실제로 저자는 2장에 이르러 현대 일본의 젊은이를 탐구하면서, 젊은이의 전형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어, 젊은이들이 내향적이라는 지적에는 사회 공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20대들의 사례를 들어 반박하고, 젊은이의 소비활동이 적다는 지적에는 그와 반대되는 통계를 제시하는 식이다.
예컨대 2005년, 의대생이었던 하다 고타(…)와 이시마쓰 히로아키(…)는 어떤 우연한 기회로 ‘150만 엔’만 있으면 캄보디아에 학교를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이처럼 젊은이들 사이에서 흡사 ‘사회 공헌 붐’이라고 불릴 만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011년에 《닛케이유통신문(日軽流通新聞)》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성은 패션, 서적, 화장품, 게임 등에 지출하는 비용이 30대(단카이세대의 자녀들 세대)와 40대(거품경제 세대)보다도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젊은이에 대한 통념들이 사실 편견임을 밝히는 소기의 목적은 충분하게 달성되었지만, 이러한 방법을 택함으로 인해 전체적인 논의가 사회 구조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다소 아쉽다. 이에 관하여는 본 쪽글의 마지막에서 다시 다루고자 한다.
행복을 논하는 방법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행복의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개인에게 내면화되어야 비로소 행복의 기준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도 몇 번이고 강조했듯이 현대의 젊은이는 균질적인 집단도 아닐뿐더러, 설사 균질적인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개개인의 행복을 외적 조건으로 이론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이론화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행복 인식일 것이다. 일본의 젊은이가 ‘행복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가 택하는 근거도 바로 개인의 행복 인식에 관한 통계자료다.
내각부(内閣府)에서 발표한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 조사(国民生活に関する世論調査)」에 의하면, 2010년도 시점에서 20대 남성의 65.9%, 20대 여성의 75.2%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요컨대, 다수의 젊은이에게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묻고, 그 결과를 집계한 수치가 곧 젊은이의 행복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여론조사가 만들어 낸 통계적 가공물로서의 ‘젊은이’가 얼마나 유효한 개념인지도 중요한 논점이 될 수 있겠으나, 일단은 접어두자.) 이러한 조작적 정의를 따른다면 한국의 젊은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통계청에서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8」에 따르면 약 30~40% 정도의 20대가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한국의 20대는 동시기 타 세대와 비교하면 다소 높은 행복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애초에 전연령대의 행복 인식이 일본에 비해 매우 낮다. 일본에서는 중년까지 점차 행복 인식이 낮아지다가 노년에 접어들어 급격하게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주지만, 한국에서는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행복 인식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도 차이이다. 일본의 20대가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면 한국의 20대는 ‘불행한 사람들 중, 그나마 행복한 젊은이들’인 듯하다. 적어도 한국의 20대를 일본과 같은 의미로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절망의 나라는 어떻게 끝나는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마지막 장에서는 허무주의의 냄새가 난다. 저자는 묘하게도 파국을 원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로 말한다.
… 국채 폭락 등의 계기로 일본이 경제 파탄에 이를 가능성이 제로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가령 일본이 IMF 관리 아래 들어가면, 사회보장비용이 크게 삭감되어 의료나 교육 등 공적 서비스의 질도 저하될 것이다. 기업의 도산이 이어지고, 실업률은 올라갈 것이다. … 그러나 설령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다고 해도, 일본의 국민이 멸족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켜야 할 것이 거의 없는 ‘젊은이’에게는 이런 사태가 기회일지도 모른다. 경직된 고용제도는 무너지고, 오직 ‘실력’으로 경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아니다. 국가 경제의 파탄은 젊은이에게도 기회가 아니다. 경직된 고용제도가 무너지고 나면 찾아오는 것은 파편화된 외주시장이다. 이것은 단지 고용형태의 변화가 아니며, 위험의 외주화이며 이익의 사유화를 뜻한다. ‘실력’으로 경쟁할 수 있는 시대는 찾아오지 않는다. (돈도 ‘실력’이라면 맞는 말이다.) 사회보장제도가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불평등한 분배와 승자독식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전쟁을 시작하겠다.’라고 선언해도, 만약 국민 모두가 도망쳐 버리면 전쟁은 시작되지 않는다.
이것도 아니다. 정부가 전쟁을 선언하면, 전쟁은 시작된다. 폭력의 독점은 현대국가의 특성이며, 도망치려는 사람들은 비국민으로 낙인찍고 침묵하는 사람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고 전례 없은 일은 더더욱 아니다. 천황제 파시즘 하에서 국민을 동원한 ‘총력전’을 벌였던 역사를 가진 국가의 비판적 지식인이 이런 발언을 진심으로 한 것이라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어쨌든 하루아침에 당장 일본의 경제가 파탄 난다거나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다행히도 경제 파탄이나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진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문적인 의미에서의 기획이나 비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돌아가야 할 ‘그때’도 없고, 눈앞에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게다가 미래에는 ‘희망’조차 없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 달리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하다.
묘한 화법이다. 일본의 젊은이가 느끼는 정체감(停滯感)을 문장으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불만은 아니다. 냉소를 섞어 경제 파탄이니 전쟁이니 하는 퇴보를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진지하게 사회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는 없다. ‘절망의 나라’는 아마도 이토록 지독한 정체와 허무주의와 속에서 끝날 것이다.
헬조선도 동조선과 같이 끝날까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도 일본만큼이나 절망적인 나라다.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한국의 인터넷 사용자들은, 일본인들이 자국을 ‘동조선’이라고 부른다는 유머2에서 일본인과의 동질감을 느낀다. 실제로 한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살률, 노인 빈곤율을 기록하는 나라다. 또 카로시(過労死)의 원조인 일본을 훨씬 상회하는 근로시간을 가진 나라다. 제1공화국의 수립 이래로 노동 환경은 언제나 열악했으며, 외환위기 이후로는 특히 고용불안정으로 인한 사회문제가 심각하다. 87년 체제의 성립 이래로 비록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민주화는 이루었으나, 생활영역에서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요원하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전방위적인 차별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객관적인 차원에서 한국의 현재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도 일본과 같은 절망적 정체의 결말을 마주하게 될까? 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젊은이는 일본의 젊은이보다 불만이 많은 정치적 시민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는 1990년대 이후의 젊은이를 논함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맥락을 제거한 채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지면의 문제도 있을 것이며, 정치 외적인 요소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판단을 내렸으리라는 짐작은 가지만, 1장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사적인 맥락을 개입시켰던 서술과는 뚜렷하게 대비가 된다. 어쩌면 이러한 탈정치적 서술 태도가 메타적으로 오늘날 일본 젊은이의 탈정치성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2장에서 젊은이의 정치참여를 논하는 절에서 전공투 운동의 실패나 55년 체제의 붕괴 후에 다시 이어지고 있는 자민당 장기집권의 특성을 언급했다면 단순히 세대별 투표율 비교를 하는 것보다는 좋은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덧붙여서, 해당 절에서 일본의 젊은이가 다른 세대에 비해 특히 정치에 미온적인 것은 아니라며 제시된 투표율은, 한국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청년 세대는 훨씬 정치적 의견표명과 투쟁에 익숙하다. 어떤 청년 집단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촛불을 들었고, 어떤 청년 집단은 젠더 권력의 해체를 외치며 혜화역에 모였으며, 또 다른 청년 집단은 장관의 퇴진을 주장하며 광장에 나왔다. 또, 한국의 기성 정치와 언론이 이러한 젊은이의 의견표명을 유효한 의견으로 인용하고자 노력한다는 사실도 일본과의 차이점이다. 한국의 87년 체제가 학생운동의 결실로 시작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차이는 두 나라의 역사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젊은이는 일본의 젊은이들처럼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헬조선은 동조선과 같은 방식으로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고도성장 시대의 종언과 출산율 감소 따위는 사실 절망이 아니다. 정치혐오와 퇴행적 정치체계가 절망의 나라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