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성
Software Engineer Server Developer Frontend Developer UI Developer Full Stack Developer Developer OSS Lover 철학 전공자 구조주의자 직장인 ù̴̲̭̼n̴̡͔͍̏d̶̛͇̖̻̅̕e̴̬͇͖̊f̸̢͈͂͒ǐ̶̺̳ͅn̴̝̣̹͂͌e̸̟̯̒d̵̢̉ͅ

마법사들이 산다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

SF 소설의 3대 거장 중의 한 명인 아서 클라크가 제안한 3법칙 중 마지막 법칙이다. 눈 앞의 영상이 수 천 킬로미터 씩 떨어진 곳으로 전달되고, 흑백으로 찍힌 사진이 언제든 원래의 색을 되찾고, 인간을 압도하는 기계가 만들어지는 우리 시대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마법’들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엄밀한 정의는 아니지만, 마법은 마법사들이 주문(呪文)을 통해 시전하는 현상인 듯하다. 또, 마법은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로서는 그 인과를 파악할 수 없는 현상이어야 한다. 원인과 결과를 명백하게 확인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현상은 쉽게 마법이 되지 않는다. 주문과 현상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의 공백이 마법의 본질인 것이다.

그래서 마법의 인과를 온전히 이해하는 마법사에게는 ‘마법’이 더이상 마법이 아니다. 나아가 인과에 대한 인식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어느 시대의 ‘마법’은 우리에게 더이상 마법이 아니다. 이처럼 마법은 상대적이다. 라인볼트 일가는 질병의 원인이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가 마술을 부린 탓이라고 주장했고, 그러한 주장은 1600년대 유럽에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카타리나 굴덴만이 치료사이자 약재상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일반인이 모르는 지식과 기술로 카타리나가 내리던 처방은 마법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라크의 법칙을 다시 보자. 우리는 우리 시대의 기술이 만들어낸 풍경의 인과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지금 쓰고 있는 스마트폰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물었을 때 완벽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기술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 그것을 마술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기술자들이 고안한 기술로 작동하는 스마트폰과 마법사의 마법으로 작동하는 ‘스마트폰’을 구분할 수 있는가. 클라크의 말이 맞다. 현대의 기술을 ‘낯설게 보면’ 우리는 인과의 구멍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마법의 본질이다.


조금 다른 풍경을 보자.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主文).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이정미 재판관이 낭독한 선고문의 주문이다. 선고문을 읽어내려가는 음성이 현직의 대통령을 파면시킨다. 재판정 안에 퍼진 그 음성은 단지 공기의 진동일 뿐인데 어째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직의 대통령을 파면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인가. 이 인과의 공백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에게 탄핵 심판은 차라리 마법이다. 재판관의 주문(主文)은 파면이라는 마법을 시전하는 주문(呪文)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과의 공백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지 알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탄핵의 요건과 절차를 규정하는 헌법과 법률이며, 헌법과 법률에 대한 시민의 동의와 지지이다. 그곳에 마법은 없다. 민주주의는 마법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시민들의 투쟁과 피로 얻어진 것이다. 그것은 결코 마법이 아니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모른다. 마법사가 아는 것은 냉철한 인과 법칙뿐이다. 기술자의 눈에는 스마트폰이 마법이 아닌 정교한 기계장치인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자의 눈에 탄핵은 역사의 귀결이고 절차의 작동이다. 충분히 발달한 민주주의 사회에는 확실히, 마법사들이 산다.